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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죠. 반면 오래 끓여야 진국인 곰탕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깊이에서 만큼은 곰탕이 우세합니다. 무릇 오래 바라볼수록 시선은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이학송 작가의 책 ‘역사를 새긴 나무, 수행을 품은 숲’은 사찰의 노거수를 따라 걸으며 나무에 쌓인 역사와 신앙,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읽어냅니다.
저자는 빠르게 스쳐 가는 대신 한 대상을 오래 들여다볼 때 비로소 보이는 시간의 깊이를 이야기합니다.
역사를 새긴 나무, 수행을 품은 숲
이학송 ㅣ 보민출판사
사찰 마당에 들어서면 때로는 오래된 전각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얼만큼의 세월을 보냈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 나무다. 굽은 가지를 넓게 펼친 은행나무,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낸 향나무, 수백 년을 한자리에서 견뎌온 느티나무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사진도 찍지만 그 나무가 하세월 무엇을 지켜봤는지까지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생태교육가 이학송이 쓴 책 ‘역사를 새긴 나무, 수행을 품은 숲’은 그 익숙한 풍경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다.
저자는 한국 사찰의 노거수를 따라 전국을 걷는다. 나무의 나이와 생김새를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신앙, 사람들의 삶을 함께 읽어낸다. 저자가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출발.은 학교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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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동안 전국 초·중·고등학교의 숲을 조성하고 살피며 나무를 배웠다.
그러다 10여 년 전부터 사찰의 오래된 나무에 눈길을 돌렸다. 무심코 지나쳤던 노거수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감동이 일었다. 나무의 삶에 시대의 문화와 역사,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는 미래를 위해 기록을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책에는 경기 군포 수리사의 고욤나무부터 경북 청도 운문사의 처진소나무, 경기 여주 신륵사의 은행나무와 굴참나무, 인천 강화 전등사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까지 다양한 노거수가 등장한다. 강원 양양 낙산사 홍련암의 관음송, 충북 보은 법주사의 정이품송도 만난다. 여섯 부로 나뉜 여정은 나무들이 견뎌온 시간과 화재의 흔적, 사찰림이 품은 수행의 의미, 자연과 신앙이 어우러진 문화경관을 두루 살핀다.
이 책에서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수행자이자 시대의 증인이다. 왕조가 바뀌고 전란과 화재가 지나가도 나무는 계절마다 잎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다. 사찰의 건물과 공간이 변하는 동안에도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기도와 삶을 지켜본다. 사람은 떠나고 건물은 허물어질 수 있지만 살아남은 나무는 그곳에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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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조계사의 백송과 회화나무가 그렇다. 조계사의 역사는 100년이 채 되지 않지만 그 터에 뿌리내린 두 나무는 5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 저자는 이 나무들 덕분에 조계사가 근대 사찰을 넘어 더 깊은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확장된다고 바라본다. 도심의 소음 속에서 묵묵히 서 있는 나무는 그곳을 지나간 사람과 사상, 시대의 흔적을 품는다.
나무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김제 망해사의 팽나무를 다룬 대목에서는 자연이 오랜 시간 만들어온 갯벌과 인간이 짧은 시간에 조성한 땅의 가치를 대비한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 앞에서 나무는 인간의 선택이 남긴 흔적까지 묵묵히 견뎌낸다. 저자는 화마의 상처를 입은 팽나무가 남은 생애만큼은 서해의 낙조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무를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생물을 보존하는 일을 넘어, 그 나무가 살아온 환경과 시간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안동 광흥사의 은행나무 역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한자리에서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기술이 나무의 생장과 환경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시대에도 중요한 것은 결국 나무를 대하는 태도다. 그래서 책 곳곳에 스며 있는 ‘어르신 나무’라는 표현에는 자연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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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찰을 여행하는 방법도 새롭게 일러준다. 전각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불상 앞에서 기도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당의 나무를 바라보라고 권한다. 줄기의 굴곡과 가지의 방향, 뿌리가 내린 자리에는 저마다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나무를 오래 바라볼수록 사찰의 풍경은 깊어지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온 역사는 더 선명해진다.
책을 덮고 나면 사찰에서만 나무를 다르게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길가의 가로수와 학교숲의 나무도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 다가온다. 풍경의 일부라고 여겼던 나무 한 그루가 누군가의 기억을 품고, 한 시대를 건너온 생명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행의 목적지가 반드시 새로운 장소일 필요는 없다. 같은 곳을 찾더라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한다면 여행은 달라진다. 사찰의 노거수 아래 잠시 멈춰 서는 일, 그늘을 내어준 나무의 시간을 헤아려보는 일도 그렇다.
이 책은 오래된 나무를 찾아가는 여정이면서 인간보다 오래 살아온 존재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본다. 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는 우리가 아직 다 읽지 못한 역사가 자라고 있다.
※ ‘여책저책’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세상의 모든 ‘여행 책’을 한데 모아 소개하자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출판사도 좋고, 개별 여행자의 책도 환영합니다. 여행 가이드북부터 여행 에세이나 포토북까지 어느 주제도 상관없습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책을 알리고 싶다면 ‘여책저책’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화재가 지나가도
